지향점
22 Nov 2024
한과영에 온 이유는 단순했다. 중학교 때 ENE를 하면서 환경 뿐만이 아닌 인류가 당면한 여러 문제들을 기술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렇다고 정부 주도로 이런 일을 해낼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돈이라는 훌륭한 동인 아래에서 개쩌는 물건들을 만들 회사를 만들고 싶었다.

어쩌다 보니 스타트업 판에 발을 깊이 담그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다양한 인간 군상을 마주했다.

글쎄, 꿈꿨던 것 보다 창업판은 그렇게 멋있지 않았다. 지킬 게 많아지니 당연한 수순이겠지만 나름 1세대 선배 창업가라는 사람들이 해외로 나가는 대신 이미 선점한 플랫폼을 끼고 내수시장 파먹기에 돌입하는 모습이나, 누가누가 팔로알토에서 핫한 아이템 주워와서 로컬라이징 ​하냐를 겨루며 그걸 자랑하는 이들이 있는 것 까지 너무 싫었다. 창업가, 기업가가 장사꾼이랑 다르기 위해서는 돈의 이면에 자기가 추구하는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연히 훌륭한 비즈니스맨은 훌륭한 창업가의 부분집합이지만 말이다. ​

과학 판도 한과영 입학 전에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개판이었다. sci급 논문을 써내고 대학원 과목을 뒤처지지 않게 수강하는 친구가 고작 교내 동아리, 잘 쓴 독후감 따위에 전공적합성이 밀려 재수를 하느라 의미 없는 문제집을 풀어제끼고 있고, Imo요 Ipho요 하던 인재들이 강남역에서 남의 여드름 빼주는 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미박 말고 국박 하면 병신이라는 소리를 듣고 미박을 위해 커뮤니티 칼리지라도 가라는 얘기가 정설처럼 떠돌고, 수많은 연구자들이 인생을 걸고 한 발짝 한 발짝씩 힘겹게 발걸음을 떼면 전문성이라고는 눈을 씻어도 찾아볼 수 없는 인간들이 만드는 결정에 의해 천 보, 만 보씩 퇴보하는 모습을 봤다.

정확히 뭘 하고 싶은지는 모르겠지만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다. 스티브 잡스와 빌 게이츠가 해냈던 것 처럼, 내가 죽은 뒤 태어나는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그런 일. 과학을 해서 위대한 무언가를 만들고 싶다.

한과영에서 얻은 것 중 가장 뼈저리게 깨달은 것은 내 머리로 이론물리나 수학 연구에 인생 전체를 건다고 해서 TOE를 찾는다거나 리만 가설을 풀 수는 없다는 거다. 지금까지 선대 과학자들이 이루어놓은 것들을 팔로우업마저 하기 전에 늙어 죽어버리고 말 거다. 그렇지만 판을 만들 수는 있다. 한과영 아무개 같은 뛰어난 아이들을 한데 모아놓고 의사 안부럽게 돈 벌면서 연구비 걱정 안 하게는 할 수 있다. 암산으로 미방을 풀어제끼는 재주는 없지만 돈과 사람을 모아서 일을 벌리는 재주는 있다. 언젠가 누가 꿈이 뭐냐고 하면 이공계 대학원생을 위한 재단을 만들고 싶다고 했던 적이 있다. 그 꿈의 연장선인 것 같다.

KIC를 했던 것도 그런 의도도 조금 있었다. 단순히 해커톤을 한 번 연다기 보단 서울대 카이스트 보다도 훨씬 밀도 높은 한국 이공계 최상위권 인재를 만들어내는 학교에서 스타트업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을 몇퍼센트라도 만들고, 그걸 키워나갈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들고 싶었다. 행사는 성공했지만 생태계는 실패했다. 손을 안 대도 알아서 지속가능해지기 전 까지 외력으로 생태계를 만들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정말 많은 돈과 시간, 인적자본을 갈아야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수능 1등을 하면 의대가 아닌 서울대 물리를 가는 게 당연하고, 뛰어난 학부 졸업생들이 국내 대가랩이랑 미국 탑스쿨 중 고민해 볼 여지가 있는 시대를 만들고 싶다. 빅테크 만큼 높은 급여와 성장 압력을 줄 수 있는 양질의 기업이 코스피에 포진해 있고, 명문 대학들이 취업 부트캠프가 아닌 학문의 상아탑으로서의 기능을 되찾으며, 대학에서 만들어낸 날 것 그대로의 기술들이 프로덕트가 될 수 있는 견고한 산업 생태계가 있는 그런 미래를 만들고 싶다.

한강의 기적을 이뤄낸 방식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성장은 여기까지가 한계라고 생각한다. 점진적 개선으로는 절대 위의 것들을 이룰 수 없다. 판 자체를 뒤집어엎고 다시 짜야 한다. 내가 생각하는 창업은 그런 의미이다. 엑싯하고 시그니엘 입주하는 것이 아닌, 엔비디아처럼 기업 하나가 판도를 뒤집는 선례를 만드는 것. 그 네임밸류와 힘을 가지고 과거 벨 연구소 처럼 수많은 빅테크를 탄생시킬 수 있는 학술적, 문화적, 금전적, 산업적 기반을 닦는 것이 목표다.